옛 선조들이 남긴 글을 읽으려고 서해문집 【오래된 책방】 시리즈를 꽤 많이 구입했다. 원래 시리즈를 계속 읽을 생각은 없었는데, 앞서 읽었던 「발해고」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한 권, 두 권, 기존에 읽고 싶었던 고전을 몇개 골라내다보니 어느새 9권이나 구매. 이럴 바엔 그냥 시리즈 1권부터 하나씩 살껄 그랬나 후회가 들긴하지만... 이게 또 몇 몇 고전은 다른 출판사 버전으로 가지고 있거나, 읽어 본 것도 있는지라 참 애매하다. 이 책, 「동도일사」는 서세강점의 시기. 조선이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은 이후에 쓰여진 글이다. 정확히는 당시 부산에 살던 선비 박상식이 제2차 수신사 사행원으로써, 근대 일본을 방문 한 뒤 남긴 일종의 일기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사적인 일기라고 말하기에는 또 어렵다. 어찌보면 이 책은 일기이기 이전에, 수신사행에 대한 업무 보고서 같기도 하다. 이 책 「동도일사」의 구성을 보면 이렇다. 1부는 박상식 본인의 사행일기, 2부는 정사 김홍집과 일본 외무성 관료와 주고 받은 문답, 3부는 수신사 관련 공문이다. 즉 1부는 본인 일기, 2-3부는 사행원이자 일종의 속기사로써 받아적은 공적인 업무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은 일본으로 수신사를 보냄) 이 책을 한글로 국역한 이에 따르면, 지금까지 제2차 수신사 관련 연구는 《수신사행등록》, 《수신사기록》, 《동문휘고》, 《왜사일기》, 《김홍집유고》 등을 기본 사료로 활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 「동도일사」에는 앞서 언급한 기본사료에는 없는 기록들이 상당부분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료적 가치가 큰 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학계의 주목은 커녕 존재 자체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뭐 그것과 별개로 책을 읽으면서 순간순간 욱하고 올라오는 지점이 여럿 있었다. 아니 생각보다 많닸다. 강화도 조약이 어떤 조약인지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던 조선의 위정자들은 세계사적으로 조선의 위치가 어땠는지를 알지 못했고, 본인들이 얼마나 ‘함몰’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소)중화사상에 찌들어있었다. 조선보다 먼저 개항하여 변화와 개혁을 한 근대 일본을 눈 앞에 두고도 그들을 업신여겼다. 오히려 일본에서 만난 청나라 사람들을 동포 만나듯 했고, 그럼에도 청나라 사람들이 ‘대 명나라’의 사람에 비해 못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살고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명나라를 이어가는 ‘소중화’였기에, 실제 조선이라는 나라는 빈껍데기였다. ‘소중화’ 그 안에 함몰되어 있으며 빗장을 꽁꽁 걸어닫고 있었기에, 외세가 침범해도 그 속뜻을 이해 못했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소중화’라고 정신승리에 취해,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기울어져가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게 당시 조선의 위정자였다. 제 2차 수신사 김홍집을 비롯하여 사행원들이 만난 사람들 중에는 우리가 아는 인물들이 몇몇 나오는데, 적어도 좋은 의미로 아는 인물은 아니다. 일단 전부 메이지 시대의 인물이며,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당시에 다들 한 끝발 하던, 혹은 관련 업무를 하던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리는 인물이 두명 있으니 ‘이토 히로부미’와 ‘오쿠라 기하치로’다. 경술국치 이후 초대 조선통감 이었던 이토 히로부미, 우리나라 문화재란 문화재는 일본으로 무단반출한 ‘오구라 콜렉션’을 알린 오쿠라 기하치로. 이런 사람들은 2차 수신사들은 반갑게 맞이했다. 어쩌면 강화도 조약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던 그들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이때 우리 선조들은 세상물정을 몰랐고, 너무나 순진했다. 2차 수신사들에게 이토 히로부미나 오쿠라 기하치로 등은 그저 조선에서 온 사행원을 위해 찾아온, 정성을 보여준 일본인 손님에 불과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순조 때 까지 조선에서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행은 꾸준히 있었다. 통신사를 일본으로 보낼 당시 조선의 위치는 일본보다 위, 그러니까 ‘우리가 너네 나라의 격을 높여주기 위해 특별히 통신사를 보내주겠다‘라는 느낌이 강했다. 적어도 조선에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은 자국 내에서 조선이 일본 막부에 조공을 하는 사절이라고 했으며, 일본이 유일하게 교류한 서양 네덜란드에도 조선을 일본의 종속국이라 했다. 조선만 몰랐을 뿐이다. 앞, 뒤가 달랐던 일본을 봐왔고 임진/정유재란이라는 전쟁의 참상까지 겪었는데도, 또 당한거다. 조선은 그저 우리의 높은 문물을 일본에 전달해준다고 생각했을 그 뿐이었다. 통신사 교류 중단도 일본에서 먼저 요청했다. 일본은 조선 통신사를 통하여 빼먹을 기술은 다 빼먹었고, 어느 시점부터 조선보다 일본의 기술이 낫다는 것을 깨달은 뒤였다. 그 때가 조선 순조 때다. 조선에서는 세도정치가 판을 쳤던, 조선의 발전시계를 200년 정도 후퇴하게 만들었다는 바로 그 때다. 바로 이때 조선은 퇴보했고, 일본은 발전했다. 이후 얼마 안가서 일본은 조선을 찾아와 문호개방을 요구하니, 최초의 근대조약이자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이다. 강화도 조약을 맺은 후 답방 겸 재개된 게 수신사인데, 앞선 통신사와는 차별점을 둬야 하기에 부르는 명칭도 ‘수신사’로 바뀐 것이며 그 이동경로도 달라진것이다. 달라지지 않은 거라고는 일본은 조선보다 아래라고 생각한 통신사의 마음과, 수신사의 마음이랄까. 이 책의 저자 ‘박상식’이 참가한 제2차 수신사 사행원 명단을 보면 낯 익은 이름있었다. 「조선책략」을 가지고 왔으며 당시 쓰러져 가는 조선을 개혁하려 했던 김홍집, 얼마전 광주공원에서 만난 친일파 윤웅렬, 그리고 종두법의 지석영. 특히 지석영은...진짜 그 종두법의 지석영이 맞나 잠깐 고민했는데, 아주 친절하게도 책 말미에 그 지석영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이 책을 읽으며 답답했던 점이 정말 많았지만 그나마 다행인건, 당시 수신사 정사였던 김홍집이 늦게나마 국제정세에 눈을 떴다는 점이다. 문호 개방, 부국강병, 근대화에 필요성을 깨달았기에 이 때 그 유명한 「조선책략」을 조선에 가지고 온 것이다. 물론 이 책을 가져와서, 조선의 위정자들이 얼마나 동조를 했느냐를 이야기 한다면, 거기서 끝이라는게 아쉽긴 하다. 당시 조선의 왕과 고위관리들은 그저 자기들의 재산과 안위를 지키기 위해 급급했고, 그를 위한 정치를 했으니까. 말이 근대화 개혁이지 정말 백성을 위한 근대화 개혁이었나? 라고 들춰보면, 어디까지나 ‘황제’를 위한 개혁이었으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유독 욱했던 부분들이 <2부, 정사 김홍집과 일본 외무성 관료들의 문답>에 참 많이 있었다. 조선 후기의 외교능력이 얼마나 덜떨어졌는지,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치가 얼마나 불통에 유연함이 없었는지. 일부만 발췌 해본다. -요시카와: 병사의 기숙사와 기국은 볼 것이 많은데 여행기간이 이처럼 촉박한가-김홍집: 종전 통신사의 행차는 이보다 더 되지 않았다. 또한 병학과 기계는 이 사신이 어수룩해서 평소에 아는 바가 없어서 보더라도 도움될 것이 없다. -우에노: 신문을 보니 귀국 신사가 글씨를 잘 쓴다는 데 본 받을 글씨를 주시기 바란다.-김홍집: 본 신사는 글씨 쓸 줄 몰라 귀국에 들어왔을 때도 붓을 잡은 적이 없다. 혹 사행원 중에 글씨 쓰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게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닌가-우에노: 아니다. 신문에서 전한 것은 부산에서 온 사람이다. 들으니 귀국신사는 문망이 있다고 했다.-김홍집: 이것은 혹 잘못 전해진 것이다. 대단히 부끄럽다. -우에노: 우리 나라는 요즈음 부강해지는 기술을 모두 터득했다. 귀국도 부강해지기를 원하는 만큼 상무가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바란다. 요즈음 세계의 형세가 일본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 순치의 도움이 있어야 하니, 귀국과 함께 동심동력으로 군무나 기계 등 어느 곳이나 서로 이끌어 구라파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김홍집: 귀국의 왕성한 의욕이 이러하고 우리나라와 우리 정부에 일찍 알게 해 주어 감사함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강토가 한구석에 있고 서쪽에는 청국 동쪽에는 귀국이 있는데 그 밖의 다른 나라는 처음부터 경계를 접하지 않고 왕래도 없으므로 조야(조정과 민간)의 인심이 옛 규정만 지키니 오늘날의 사세가 실행하기 쉽지 않은 바가 있다. -이노우에: 이 자리의 대서기는 어제 독일에서 돌아왔는데 이탈리아 지방에서 러시아 해군경을 만나 같은 배를 타고 중국 상해 땅에 와서 길이 갈렸는데 앞으로 연료를 싣고 다시 나가사키 섬으로 온다고 한다. 배 안에서 그의 동정을 살피니 걱정이 되어 대단히 조급했는데 중국 일이 다행이 잘 끝나 빨리 떠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중략) 이 때 귀국 병력은 그들을 막을 수 있겠는가? 러시아 사람이 이 곳에 자리를 잡게 된다면 우리나라의 걱정이 다시 절박해질 터이니 이를 어쩌겠는가-김홍집: 우리나라는 러시아와 국경은 상접해 있을지라도 서로 통상하지 않고 오직 귀국에게만 친목하므로 유사시에는 서로 보호해주기 바란다. -이노우에: 각하가 돌아가 보고할 지라도 조정에서는 들어줄 이유가 없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충고하지 않을 수 있나? 서양 각국은 먼저 수호하기만 바랄뿐이지 서둘러서 반드시 통상을 하려 하지 않는다. 현재 귀국의 계획을 보건대 병사와 기계는 배울 필요가 없고 오직 빨리 몇 사람을 파견해 이곳에 와 머무는 동안 각국의 교제 사정을 상세히 연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니 허술하게 듣지 마시기 바란다. 만약 위험에서 안전하게 회복하고 재해에서 유리해진 뒤에도 성의를 마음에 두지 않으면 다시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외교력도 꽝이었고, 정보력도 꽝이었으며, 보고 듣고 배울 마음 조차 없었다. 오죽 답답하면 일본 외무공사가 “각국의 교제 사정을 상세히 연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니-” 라는 이야기 까지 할까 싶었다. 일본에서 이런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도 수신사 일행은 때 되면, 조선에 있는 왕을 향하여 망궐례
도쿄에 간 조선 수신사의 근대 일본 견문기
1876년 제1차 수신사가 112년 만에 도쿄(에도)에 다녀오고 4년 뒤. 조선 정부는 근대 서양문물을 탐구하고 조일 외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신사 김홍집을 필두로 하는 제2차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한다. 이때 동래부 향리 출신 박상식은 김홍집의 수행원이자 향서기로 선발되어 제2차 수신사행에 동참한다. 동도일사東渡日史 는 수신사행에서 돌아온 그가 사행 기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작성한 일기, 대화체로 기록한 조일 외교공사들의 토론, 양국이 주고받은 공문 등을 정리해서 묶은 책이다.
박상식은 수신사 일행이 5월 28일 한양에서 출발하여 부산에서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 고베, 요코하마를 지나 도쿄에 도착해 외교 문답을 나눈 뒤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는 약 1개월간의 여정 내내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 비록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출발하는 2~3일분의 내용이 소실되었지만, 그는 김홍집을 가까이서 보필하며 향서기鄕書記라는 직책답게 제2차 수신사 일행이 공식적으로 만난 일본인, 청국인, 방문한 장소, 구경한 근대 문물과 일본 시가지 풍경 등을 자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또한 공적인 활동은 물론 여타 수신사 기록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개인 활동까지 상세하게 서술했다. 덕분에 동도일사 를 통해 일본 관리들이 사는 집과 정원의 모습, 요시와라 유곽의 개화기 요정料亭, 수백 가지 희귀한 동식물 표본을 모아 놓은 박물관의 모습까지 엿볼 수 있다.
머리말
동도일사 에 대하여
일러두기
동도일사 | 일기
동도일사 | 문답
동도일사 | 공문
박상식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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