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구에 가면 박수근 미술관이 있다. 한 여행사에서 내놓은 여행상품 덕에 미술에 대해 어떠한 조예도 지니지 못했음에도 가보게 되었다. 그리 넓지 않은 전시공간에 듬성듬성 들어찼던 작품들을 바라보는 내내 아쉬움이 컸다. 개개인에게 팔려나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지 짐작조차 불가능한 작품들을 머릿속으로 빈 공간에 그려 넣기 바빴다. 그래도 한 사람의 생을 추모하고자 하는 의지만큼은 공원으로 잘 형상화돼 있었다.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는 화가 박수근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지역에서 1914년 태어났고, 가난 탓에 마지막 배움이 되어버린 양구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널리 알려진 인물인지라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그의 생에 관한 기록을 검색할 수 있다. 박수근의 아내 김복순의 기록이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왔다. 어쩌면 이 책 역시 누군가에겐 아주 익숙한 내용일지 모르겠다. 이미 여러 간행물에 실렸었으니 말이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분량에는 박수근의 모든 생이 담기지 못했다. 1959년에서 기록은 끊어진다. 그녀가 사망함에 따라 더 이상 기록을 잇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여느 기록에서는 보기 힘든 소소한 에피소드가 이 책엔 가득하다. 이를 통해 나는 화가 박수근의 인간됨에 대해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와 만나기 전의 기록은 어디선가 들은 것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그 덕분에 시대가 안고 있던 불행과 가난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역시나 두 인물이 부부로 연을 맺게 된 것에 대한 내용이었다. 열일곱 살 어느 날, 박수근의 가족은 그녀의 아랫집에 들어왔다. ‘키가 크고 눈이 둥글게 큰’ 청년으로 그녀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외모가 가난의 그림자마저도 지운 게 아닌가 싶었다. 실제로 그는 잘 생겼고,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생김새만 놓고 본다면야 일등 신랑감일 수도 있겠지만 오로지 그림만 그리는 통에 처음에는 부모의 반대가 심했던 모양이다. 다른 이와 약혼까지 했다가 다시금 결정이 번복돼 박수근과 평생을 함께하게 되기까지, 결정은 어른들이 내렸으나 그 과정을 좌우했던 건 내심 그를 마음에 두고 있던 그녀의 진심이 아니었을까 싶다. 끊임없이 오가던 편지로부터 예술가 특유의 기질이 느껴졌다. 남성이라면 으레 가부장적이던 시절이었을 텐데도 자신의 마음을 글에 담아 드러내는데 그는 거침이 없었다. 하루가 머다하고 오가는 편지에 우표 값이 걱정될 지경이었다는 사실에서 ‘사랑’으로 통칭되곤 하는 수많은 감정들을 떠올려보게 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길 반복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조금 더 세련된 방식으로 사랑을 고백하지만 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텅 빈 게 아닌가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생사도 모른 채 목숨 걸고 남으로 향하던 그녀의 모습 또한 인상 깊었다. 그와 다시 만나기 위해 살아있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그녀의 모든 마음은 그의 생사 여부를 향하고 있는 듯했다. 마음은 일방적이지 않았다. 박수근 또한 때때로 아기를 돌보고 집안일로도 손을 뻗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미래는 불안했고, 어딘가에 고용되지 아니 한 자유로운 입장이었던 그는 불안을 술로 해결하려 들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이라며, 나빠진 건강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술을 들이킨 결과 그는 눈을 잃고 건강을 잃었으며 마침내 스스로도 잃었다. 착하고도 올곧은 심성과 지고지순한 사랑도 그렇게 시들었으니 일찍 그를 여읜 건 우리로선 비극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나온 2014년은 박수근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그리고 올해는 그의 사후 50주기에 해당한다. 이를 기념하는 몇몇 전시가 열린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떠난 지 반세기가 훌쩍 흘렀다. 물질적으로는 분명 풍요로워졌으나 정서적으로는 오히려 그의 시대보다도 더 메마른 게 아닌가 한다. 정적인 캔버스에 그가 담아냈던 사람들, 그가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만큼은 여전히 그의 그림 속에 살아 있다. 화가의 정신을 있는 그대로 혹은 그보다 더 따스한 시선을 하고 바라보는 건 우리들에게 주어진 몫이다. 과연 우리는 그 몫을 제대로 수행해낼 수 있을 것인가. 각박함 속에서도 예술혼을 불태웠던 한 생(生)을 그윽히 바라볼 만큼의 여유가 지금 우리에겐 없는 듯해 아쉽다.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사랑한 화가
박수근의 삶과 그림을 돌아보다
박수근이 사랑했던 아내 김복순이 들려주는 화가 박수근의 일생
포대기를 둘러 아기를 감싸 업은 한 여인이 가지만 앙상한 나무 옆을 서성대고 그 옆으로는 짐을 머리에 인 여인이 종종걸음을 옮기고 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이 그림은 박수근 화가의 그림 [나무와 두 여인]으로, 박완서의 소설 [나목]의 표지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소설 [나목]의 실제 모델이자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화가 박수근이 서거한 지 올해로 50주년(2014년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박수근의 삶과 그림을 재조명하고자 아내 김복순의 회고록 [박수근 아내의 일기]를 펴낸다.
화가 박수근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박수근의 삶과 박수근이라는 개인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박수근 아내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던 이 글은 박수근이 평생을 두고 사랑했던 아내이자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박수근의 인생을 함께 살아온 김복순의 회고록으로서, 박수근이라는 화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입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중요한 자료로 알려져 왔다. 1980년 선화랑에서 출간하는 잡지 [선미술]에 연재되었다가 선화랑에서 소책자로 제작하여 희귀본으로 떠돌던 이 글은, 그 뒤로 여러 책들에 발췌본이 실리기는 했지만 정식 단행본으로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박수근 아내의 일기]에 담긴 박수근의 그림과 아내의 회고를 통해서 박수근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들여다보고, 그의 삶을 통해 그의 그림을 읽어갈 수 있다. 또한 박수근의 인간적인 면모와 화가로서 박수근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소설가 박완서의 산문과 미술평론가 유홍준의 해설을 덧붙였다.
한국근현대사의 질곡 속을 온몸으로 살아낸 위대한 화가의 삶을 따라가 보자. 박수근을 찾아 떠나는 길에 [박수근 아내의 일기]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초상화 그리던 시절의 박수근 _ 박완서
아내의 일기_김복순
부록
-박수근 그의 예술을 다시 생각한다_유홍준
-박수근 아내 김복순의 회고록에 대하여_최석태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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