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혈귀의 비상/미셸 투르니에/이은주/현대문학
한달 가까이 걸쳐 다 읽고 나서는 시원섭섭한 허탈감이 몰려왔다.
몇 년 전 저자의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끝』을 읽고서 혼란스러워 했던 기억이 있다.
『로빈슨 크로소』의 프랑스판 버젼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책과 같은 선례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저자가 문제의 책에 대한 다른 사람의 평가를 인용한 것은 자긍심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내가 그 책을 출판했을 때, 한 미국인 비평가가 곧 그 소설에 대해 이렇게 썼던 것이다. “이것은 프로이드, 월트 디즈니, 그리고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 의해서 다시 쓰여진 로빈슨 크루소이다.”-589p
저자는 글을 쓰고 그것을 책으로 출판하는 작가로서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출판될 수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내놓은 책이 질이 좋고 제값을 하는 상품이어야만 내 잠자리는 편안하다. -12p
책이 가진 자연스럽고 억누를 수 없는 소명이 있다면 그것은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이라는 말로 정의한 책의 역할에 대한 저자의 신념은 확고하였다.
한 권의 책을 출판할 때 그는 익명의 남녀의 무리 속으로 종이로 만들어진 새떼를, 피에 굶주려 야윈 흡혈조들을 풀어놓는 것이다. 그 새들은 닥치는 대로 독자를 찾아 흩어진다. 한 권의 책이 독자를 덮치면, 그것은 곧 독자의 체온과 꿈들로 부푼다. 그것은 활짝 피어나고, 무르익어, 마침내 자기 자신이 된다.-14p
책의 효능을 말하고 있는 이 글에서 공포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 비롯되었다.
저자는 소설가로서의 고충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나는 이따금 초등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러 가곤 하는데, 그들은 소설이 제기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 즉 “당신 이야기에서 무엇이 진짜인가?”라는 질문을 내게 종종 던진다.(중략)
이 끔찍한 질문에, “나는 언제나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쟁이다”라는 장 콕토의 말만이 완벽한 대답이 될 수 있다.-16p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소설이 아니었다.
소설가들이 소설만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깜빡하고 소설 같은 제목만 보고 구입하였다.
저자의 독서노트였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구입했으니 읽어볼 밖에는.
작품의 내용과 그 속에 담긴 철학과 당시의 시대 상황, 작가의 온 생애까지를 망라하는 작가론에 버금가는 글들이어서 단순한 독서기를 예상했던 나로서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다 읽기는 했다.
저자가 섭렵한 작가들이 어디까지이고 내 지식의 바닥이 어디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것은 처음 몇 편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거론된 약 30여명의 작가 중에 이름이라도 들어 본 사람은 몇몇에 불과 하였고
앙리 드 캉피옹, 노발리스, 제르멘느 네케르 드 스탈, 카스파 하우저, 가브로슈, 쥘 발레스, 이자벨 에버하르트, 콜레트, 아치볼드 조셉 클로닌, 클라우스 만, 에밀 아자르, 모리스 주느부아 등 듣도 보도 못한 생경한 인물들이 한없이 흘러 나왔으니.
로맹 가리가 가상의 인물을 창조하여 작품을 발표하고 콩쿠르 상까지 수상하게 만들었던 에밀 아자르 정도가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이었다.
그의 작품 《튤립》에서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구절을 쓸 수 있는 작가였으니 세상을 완벽하게 속이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울 줄 알아요?” 비들이 물었다.
- 내 눈물들은 모두 죽었어.
- 죽었다니, 무슨 소리예요? 왜 죽어요?
- 눈물들은 부잣집 애들이거든.(하략)-560p
최근에 읽었던 『마담 보바리』의 창작 배경을 알게 된 것은 또 다른 소득이었다.
노르망디의 큰 마을인 리에서 일어난 젊고 아름다우며, 열정적이고, 몽상적인 의사 부인의 자살에서 착상을 얻어 보라고 매우 완곡하게 제안한 사람이 부이예이다.
플로베르의 제일 유명한-그리고 아마도 프랑스 문학 전체에서 제일 유명한-소설인 이 작품이 이러한 기원들에서 유래한다-242p
그동안 얼마나 책들을 얇고 쉽게 읽어 왔는지에 대한 자성이 뼈저리다.
책의 마지막을 “다섯 스승의 짧은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마무리한 것은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느끼고 깨달아야 하는지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된다.
책이란 피를 많이 흘려 마르고 굶주린 새들로, 살과 피를 가진 존재- 즉 독자를 찾아 그 온기와 생명으로 제 배를 불리고자 미친 듯이 군중 속을 헤매어 다니는 것이다.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의 독서 노트로, 작가와 작품에 대한 광범위한 사료를 바탕으로 재창조한 비평이 가히 프랑스와 유럽의 문학, 사회사를 방불케 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가 셰익스피어 와 만나고, 뜨거운 낭만주의, 보바리 부인과 토마스 만이라는 거대한 산맥에 대한 통시대적 고찰이 시도되고 있으며, 페로의 동화들이 사무엘 베케트와 나란히 서기도 하는 지적 탐닉과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투르니에의 글쓰기 는 다른 책들 속으로 파고드는 또다른 문학적 참여를 의미한다.
권말에는 투르니에가 자신의 스승으로 소개하는 다섯 사람에 대한 회상을 덧붙였다.
1) 흡혈귀의 비상(서문)/ 2) 트리스탄과 이졸데 / 3) 푸른 수염 혹은 콩트의 비밀 / 4) 앙리 드 캉피옹의 이상하고 치명적인 ‘슬픔’/ 5) 베르사이유 풍경 : 생-시몽의 회상록 의 여백에서 / 6) 칸트와 문학비평 / 7) 노발리스와 소피아 / 8) 괴테와 친화력 / 9) 제르멘느 네케르 드 스탈. 한 여인의 초상 /10) 클라이스트 혹은 시인의 죽음. 자료들 / 11) 카스파 하우저 / 12) 적과 흑 / 13) 고리오 영감 , 동물학적 소설 / 14) 질식한 신비주의자 : 마담 보바리 / 15) 플로베르의 세 단편 에 나타난 필연과 자유 / 16) 에밀, 가브로슈, 타잔 / 17) 쥘 발레스 /18) 사진가 에밀 졸라 /19) 이자벨 에버하르트 혹은 완성된 변신 / 20) 앙드레 지드를 위한 다섯 개의 열쇠 / 21) 콜레트 혹은 1번 식기 / 22) 유토피아와 엑조티즘. 펄 벅의 어머니 에 대하여 / 23) 크로닌 혹은 잃어버린 그리고 되찾은 성채 / 24) 헤르만 헤세와 유리알 유희 / 25) 클라우스 만의 메피스토 / 26) 장 폴 사르트르 / 28) 귄터 그라스와 그의 양철북 / 29) 에밀 아자르 혹은 자기 뒤의 생 / 30) 이탈로 칼비니즘의 원리들 / 31) 앙드레 말로 / 32) 다섯 스승의 짧은 초상- 모리스 드 강디약,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드니 드 루즈몽, 에른스트 윙거, 모리스 주느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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